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읍 전투 (문단 편집) == 결과와 영향 == 전투 이후 위표는 포로가 되어 유방이 있는 형양으로 끌려갔고, 유방은 위표를 한번 봐주기로 했지만 한번 배신한게 워낙 한군의 장수들에게 안좋게 찍혔는지, 이후 형양을 수비하는 도중 '''"배신자와는 같이 일할 수 없다."''' 는 이유로 [[주가]](周苛) 등에게 [[자업자득|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당시 형양이 함락 직전이었던 만큼, 누군가가 배신이라도 하면 끝장나는 셈이라 이미 난세의 [[박쥐]] 이미지가 박힌 위표를 성 내에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겨진듯. 평정된 서위의 영역은 한나라에 의하여 하동, 상당, 태원군이 설치되어 확고한 한의 지배 영역이 되었다. 한신을 따라 큰 공을 세운 조참은 이 지역의 식읍을 받았는데, 그 영향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양후(平陽侯)가 되었다. 서위를 평정하여 위표를 무찌른 것은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앞서도 말한 부분이지만 서위의 영역은 유방의 지배 영역인 관중, 그리고 팽성대전 이후 파도처럼 다가오는 항우의 서진을 막아내는 [[형양 · 성고 전역]]의 수비라인인 형양 - 성고의 머리에 있었던 상황이라, 장기적으로 이런 세력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면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이 세력 배치를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옮긴다면, 이건 곧바로 유방과 [[팽월]](彭越)이 항우를 상대하고 있는 형세와 비슷해진다. 유방과 팽월의 기각지세가 초한전쟁에서 한군이 승리한 원동력이었음을 감안하면 잘못했다간 '''항우와 위표의 기각지세'''가 유방을 덮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한군이 단독으로 초나라를 평정하는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을 때, 승리를 위해서는 [[오셀로]]와도 같이 한군의 세력 범위를 점차 넒혀나갈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북방의 제후들을 복속시키려 한다쳐도 위표가 있는 한 대군을 보내기도 힘들고, 보낸다쳐도 후방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엄밀히 말해 한신이 북벌을 요청한건 위표를 평정한 이후지만, 위표를 평정했기에 북벌에 나서는게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지형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기세라는 측면에서도 이 싸움은 중요했다. 팽성대전에서 한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진여를 비롯한 제후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방을 기만하다시피 하며 등을 돌린 위표를 평정하지 못했다면, 패전 이후 경포 등을 필사적으로 끌이들이던 유방은 정치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형양에서 간신히 항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고, 관중에서는 대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이 공격이 실패하고 군대가 전멸하기라도 했다면 유방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단 한번의 우회기동''' 하나로 위표를, 그리고 이런 여타 문제들을 모조리 박살낸 한신은 이후 3만의 병력을 요청했고, 지원군과 함께 도착한 [[장이]] 등과 함께 북벌에 나섰다. 초한전쟁을 뒤집은 [[한신/생애#s-4|한신의 북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